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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 군 주둔지 옛터

4.3 항쟁의 말기 유격대(재산무장대)와 군 토벌대와의 치열한 접전을 벌인 격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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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산록북로 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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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관음사 군 주둔지 옛터


제주 한라산의 고(古)절을 거론 한다면  누구나  관음사 를 꼽을 것이다. 또한 제주 근대 불교의 중흥을 일으켰던 사찰을 말하라면 관음사를 이야기 할것이다.이러한 연유로 많은 사람들이 관음사를 드라이브 코스로 택하거나 순례지로 선정한다. 그러나 정작 관음사를 둘러본 사람들이라면 절보다는 오히려 한라산 기슭의 맑은 공기에만 찬사를 보내고 돌아올것이다. 제주 절의 특색을 살피기 위한 순례자들이라면 더욱 실망이 클것이다.

실제로 관음사는 볼거리가 거의 없으며, 제주 사찰의 특색도 사라져 버린 절이다. 근대 제주 불교의 본산이라는 요란한 명칭만 붙어 있는 것이지 고절이 유물이나 유적은 거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4.3항쟁에 군 토벌대에 의해 관음사는 깡그리 불타버렸고 1964년에 와서야 복원되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보고 있는 절은 20세기 후반기 대수롭지 않은 안목으로 치장하고 복원해 놓은 절집이다.

그러나 이 관음사에는 제주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갖고 있다. 한때 재산무장대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으며, 군 주둔지가 되기도 했다. 또한 관음사는 4.3항쟁의 말기 유격대(재산무장대)와 군 토벌대와의 치열한 접전을 벌인 격전지이기도 하다.

파도와도 같이 일렁이는 억새풀의 물결과 소나무의 짙은 솔내음이 내몸을 감싸고 돌면서 44년전 치열한 역사의 현장인 관음사로 인도한다. 사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자 은은한 목탁소리와 노승의 불경 외는 소리가 들려 온다. 불타기 이전 절집이 추춧돌이었을 잘 다듬어 놓은 돌들이 경내에 흩어져 있다. 그 추춧돌에 앉아  나는 불타기 전 관음사의 옛 모습과 제주불교의 성지가 무엇 때문에 잿더미로 변해야만 했는가를 되새겨 본다.


1909년 여승 안(安)봉려관에 의해 창건된 관음사는 제주 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갖고 있다.
관음사는 깊숙한 산중이라는 여건과 한때 무장대의 본거지였던 어승생악과 가까워 4․3 초기에는 무장대가 가끔씩 드나들기도 했다. 그러나 토벌이 강화되면서는 토벌대가 인근에 주둔했고 끝내는 토벌대에 의해 전소되는 운명에 처해진다. 흔히 '관음사 전투' 불려지는 교전은 관음사 인근에 주둔한 토벌대와 매복한 무장대간의 전투와 피난입산한 주민들을 토벌하는 것이었다. 자료 <주한미육군사령부 정보일지. G-2보고서. 1949.4.1>에 의하면 1948년 12월 15일 경비대가 관음사 인근에서 8명의 무장대를 사살했고 1949년 5월에는 5명을 사살, 20명을 생포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증언에 따르면 관음사 인근에서의 전투로 토벌대도 적지 않은 인명피해를 보았다고 전해진다. 또 아라리 등 인근 주민들의 피난입산도 많았는데 이들 중에도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는 이가 적지 않았다.
 
9연대 출신의 한 증언자는 '토벌작전 중 관음사에 들이닥친 지휘관이 관음사 승려를 고문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또 당시 어린 나이에 관음사에 기거했던 중원스님에 따르면 '관음사가 토벌대에 의해 불타자 하늘에서 천둥벼락이 몰아치는 소리가 들렸다.'고 증언했다.

1949년 2월 12일 대웅전, 향적전, 종각, 해월각 등 8채로 구성된 관음사는 토벌대에 의해 전소됐고 1968년 복원하였다.
관음사는 현재 많은 증개축과 확장으로 제주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 되었다.
또한 성역화 사업도 진행되고 있다. 관음사 입구엔 당시 토벌대의 초소가 있고 뒤편엔 초소 및 숙영지의 흔적이 여러 군데 남아있다.

1949년 3월부터 잔여 무장대 토벌을 위한 2연대의 작전이 강화되면서 2연대 2대대(대대장 이석봉 대위) 병력이 주둔했던 곳이다. 2연대는 제주도의 곳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토벌의 근거지로 삼았는데 이곳 관음사 주둔지 외에도 서귀포 수악교 인근에 1대대를 교래리와 산굼부리 사이에 3대대를 배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곳 관음사 일대는 4․3발발 당시부터 무장대의 주요 길목이었고 한 때 무장대의 본거지가 되었던 어승생 진지와 가까운 작전상 주요 지역이었기 때문에 토벌대가 이 곳에 주둔한 것으로 보인다.

관음사 경내 5만여 평의 밀림지대에 중대와 소대급 숙영지 27곳이 당시의 흔적을 간직한 채 남아있다. 규모가 큰 중대급 숙영지는 가로 세로 25m 규모이고 그 보다 작은 소대급 숙영지도 있고 3~4명이 잠복할 수 있는 초소도 여러군데 남아있다. 또 관음사 뒷산인 아미봉(해발 650m) 정상에도 숙영지와 초소가 비교적 훼손이 안된 상태로 남아있어, 4․3유적지로 보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관음사 입구의 초소는 관음사 기반정비를 하면서 일부 훼손한 것을 복원한 것이다. 관음사 입구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당시 초소를 복원한 것이 보인다. 또 관음사 대웅전 뒤편 숲속에 일제시대 닦은 작전도로가 있다. 그 길을 따라 100m 정도 들어가면 당시 숙영지와 초소를 볼 수 있다. 또 그 길을 따라 아미봉 정상에 이르면 작은 숙영지와 초소를 볼 수 있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 Ⅰ』>


관음사 군 주둔지 옛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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