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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국민학교

4·3 당시 최대의 피해마을인 북촌리 학살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곳

기본정보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일주동로 1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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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북촌국민학교


북촌국민학교는 4․3 당시 최대의 피해 마을인 북촌리 학살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1949년 1월 17일 아침, 2연대 3대대 일부 병력이 월정 주둔 11중대를 시찰하고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북촌국민학교 서쪽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마을 원로들은 숙의 끝에 군인 시신을 들것에 실어 함덕 대대본부로 운반했다. 그러나 함덕 주둔 3대대 군인들은 스스로 찾아간 10명의 연로한 주민 가운데 경찰가족 1명(이군찬)을 제외하고는 모두 총살해버렸다. 그리고 2개 소대 쯤의 병력이 북촌마을을 덮쳤다. 군인들은 아침부터 주민들이 숨어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지면서 집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으며 주민 모두에게 학교로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북촌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해갔으며 넋을 잃고 학교에 운집한 마을 사람들은 사색이 된 채 공포에 떨었다. 학교 주변엔 이미 많은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학교 운동장을 에워싼 군인들은 기관총을 3각으로 장전하여 주민들의 도주를 차단하고 있었다. 군 지휘관이 민보단장을 불렀다. 민보단장은 함덕에 간 상태였다. 머뭇거리던 부단장 장윤관이 나오자 '민보단 운영을 이따위로 하니까 폭도를 양산시켰다.'며 운동장을 돌라고 했다. 몇 바퀴 도는데 갑자기 권총으로 사살했다. 집결했던 주민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어 학교 울타리에 설치됐던 기관총이 불을 뿜더니 주민 7~8명이 쓰러졌다. 학교 운동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널브러진 시체를 한쪽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있었고, 연고가 없는 부인의 시체는 군인들에 의해 서쪽 울타리 밖으로 던져 졌다.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은 또 하나의 역사적 장소이다. 북촌대학살이 있은지 5년 후인 1954년 1월 23일 세칭 '아이고 사건'으로 다시 한번 4․3의 아픔을 되새기게 한 것이다. 이 날 전몰 장병인 북촌 출신 김석태의 고별식을 끝내고 제주의 전통 풍습인 '꽃놀이'를 통하여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영혼을 학교 운동장에서 추도키로 했다. 당시 마을 이장이던 신승빈은 '이왕에 꽃놀이를 하는 바에는 4․3사태 때 죽어간 북촌리 주민들의 영혼을 함께 달래자'고 제안했다. 이에 주민들은 술을 올리고 망자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고, 이이고' 대성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황급히 달려온 지서 경찰에 의해 제지됐지만 그 후유증은 컸다. 제주경찰서는 '4․3 당시 형살자를 추모했다.'는 죄로 신승빈 이장 등 마을 주민들을 조사하여 반성문을 쓰게 하는 등 4․3의 한을 더욱 덧칠하여 북촌 주민들을 옥죄었다. 애무하게 죽어간 주민들의 혼을 달래려고 술 한 잔 올리고 통곡한 것도 죄가 되어 신승빈은 이장직을 놓게 된다. 당시 북촌국민학교는 단층 기와였으나 마을이 소각된 후 국민학교 건물은 해체되어 함덕리 한청 단장 한재원의 창고를 지어 한청사무실로 쓰이게 된다. 현재 학교의 부지가 당시와 별 차이가 없으나 건물의 형태는 현대식으로 탈바꿈했다. 북촌리대학살은 제주4․3의 가장 크고 비극적인 사건이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Ⅰ』>


북촌국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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