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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당시 제주농업학교는 도내의 인재들의 몰려들어 수학에 정진했던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4․3이 발발하면서 이곳에는 제9연대를 시작으로 11연대(48년 5월), 2연대(48년 12월), 독립제1부대(49년 7월) 등의 사령부가 줄줄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군 토벌대가 이 곳에 주둔하면서 도내의 내노라하는 유지들과 지식인, 그리고 입산 자수자와 체포자 등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잡혀와 고문과 취조를 당한 후 처형되거나 육지형무소로 끌려갔던 한과 눈물의 장소이기도 했다.
해방직후인 1945년 9월 28일에는 일본군의 항복절차가 제주농업학교에서 진행됐고, 이어 학교 내에 미59군정 중대본부가 설치됐다. 1945년 9월 10일,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오대진) 결성식이 이곳에서 열리며 해방직후 민중자치운동의 시작을 알리기도 했다.
제주농업학교는 제주도 고등교육의 산실로 일제시대에는 일제에 항거한 학생운동이 본산이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미국의 점령정책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이 거세었던 곳이다. 특히 ‘양과자반대투쟁’ 등 미군정에 대항하는 운동을 주도했고, 1947년 3․1 시위에도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상황은 4․3 당시 초토화 작전을 맞아 농업학교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희생되게 만들었으며, 실제 농업학교 학생과 교사들 상당수가 토벌대의 횡포를 피해, 혹은 자진해서 입산하기도 했다. 그만큼 희생자도 많이 발생했다.
현재 제주농업학교는 제주고등학교로 개명되었으며 학교부지는 노형동에 있다.
4․3당시 학교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한국토지공사 제주지사’가 들어섰고, 운동장이 있었던 부지는 모두 주택가로 개발되어 당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전에 농업학교가 있었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전농로의 벚나무 만이 그 비극의 역사를 묵묵히 전할 뿐이다.
<출처 : 제주4.3연구소 소식지; 한라일보(2008.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