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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연폭포 & 제주4.3중문면희생자위령비

천제연폭포 & 제주4.3중문면희생자위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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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천제연로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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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연폭포 & 제주4.3중문면희생자위령비


천제연 주차장은 일제시기 소, 돼지를 도살했던 장소로 1949년 1월 4일 중문면 관내 주민 36명이 집단학살된 곳이다.
이 날 군인들이 소위 '명부'를 들고 각 마을을 다니면서 명단에 들어 있는 사람들을 끌고 가 학살했다.
1949년 1월 4일 남편(대포리 송성옥)이 끌려가 희생됐다는 중문동 임춘득 씨는 당시를 이렇게 증언했다.

"남편이 총살될 때는 대포리 상동 주민들이 회수리로 소개해 살던 때입니다. 남편이 중문리로 끌려가자 난 저녁밥을 준비해 찾아갔지요. 그런데 유치장에는 남편이 없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서성거리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습니다. 남편이 총살당하는 소리라는 걸 알고는 눈물이 쏟아져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습니다. 급히 현장에 가 보니 쇠줄로 목이 묶인 채 총에 맞은 36구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무고합니다. 남편은 당시 경찰이던 5촌 삼촌(송두석 경사)의 권유로 경찰에 지원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또 다른 5촌 삼촌이 입산한 것에 연루됐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 5촌 삼촌은 진작부터 대정골에 양자들어 남편과는 얼굴도 잘 모르던 사이였습니다. 총살장에서의 상황은 그 자리에서 총 한 발 맞지 않고 구사일생한 이문기 씨에 의해 알려졌습니다. 이문기 씨에 의하면 총살 직전에 일부는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쳤고, 일부는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토벌대는 '이 놈은 대한민국 만세라고 했지만 제 친척에게서 물이 들지 않았을 리 없다'면서 남편을 쏘았다고 합니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난 '총살자 가족'이라 하여 갖은 수모를 겪었습니다. 한 번은 생손을 몹시 앓아 보초 시간에 5분 늦었는데 서북청년단 출신 응원경찰이 총으로 마구 때렸습니다. 그 때 허리를 다쳐 지금도 제대로 걷지 못합니다. 16살 동갑으로 결혼해 21살 때 남편을 잃었습니다만 그 동안 어디에 하소연 한 번 못 해봤습니다. 당시 3살이던 아들 하나 의지했는데 아들도 얼마 전에 병으로 죽었어요."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Ⅱ』>


제주4.3 중문면 희생자 위령비

2008년 봄, 4.3희생자 중문유족회는 천제연 입구에 제주4.3 중문면 희생자 위령비를 세우며 그 감회를 건수기 서두에 이렇게 수로히했다.
4.3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중문면 영남리, 용흥리, 강정리, 도순리, 월평리, 하원리, 대포리, 회수리 중문리, 색달리, 상예리, 하예리 등지 희생자 786위 영령들의 이름을 60년 만에 빗돌에 새겨 신원하려 하니 슬픈 마음 가눌 길 없소이다.

1948년 11월 5일, 무장대는 면소재지인 중문면 마을을 습격하여 면사무소·중문중학원·양곡창고 등을 불태웠다. 그리고 며칠 후인 11월 17일에는 정부가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지대를 적성지역으로 간주하여 초토화작전을 감행했다. 그 후 주민들은 사상불순 및 예비검속으로 끌려가 학살되거나 행방불명됐다. 서귀포경찰서는 주문 다수를 연행해 정방폭포 주변 일대를 학살현장으로 만들었고, 중문지서는 자운당골·버리왓·대습이우영·신사터·천제연 주변을 학살현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유족회는 200년 1월 12일, 4.3진상규명운동이 결실을 보아 4.3특별법이 제정되고, 2003년 10월 31일에는 대통령이 국가공권력의 남용을 유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 지금, 영령들도 용서·화해·상생의 마음으로 미래를 맞자고 호소하고 있다.

<출처: 제주4.3희생자유족회, 『제주4.3희생자유족회 27년사』, 2016>


천제연폭포 & 제주4.3중문면희생자위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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